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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이야기

병인(病因)과 처방(處方)의 치료 범위에 대하여

by 키다리원장님 2012. 12. 24.

병인(病因)과 처방(處方)의 치료 범위에 대하여

"식적(食積) 증후군"이 관찰되어 평위산을 투여하면 많은 경우 식적 증상이 소실되면서 그에 속발하는 증상(혹은 넓은 의미로 식적 증후군에 포함된다고 간주되는 증상)이 소실됩니다.

하지만 전형적인 식적의 증후를 보이지 않는 경우에도, 특별히 달리 줄 만한 약이 없어서 혹은 정황상 식적이 의심되어서(불규칙적인 식사 습관, 차고 기름진 음식, 분식 선호 등등...) 평위산을 처방하는 경우에도 전신 증상(호흡기, ENT, 피부, 비뇨기)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숨은 병인은 식적이었구나...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병인에 기반한 이러한 추론은 실체를 잘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인(病因)과 처방의 치료 범위에 대한 글이 있어서 옮겨봅니다.


우리가 흔히들 범하는 오류 중의 하나가 무슨 처방을 사용해서 환자의 병증이 호전되었다면 그 처방의 사용설명서에 주로 지적하는 병인(病因)에 적중하였기에 그 병(病)이 나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계지탕을 먹였더니 좋아졌다하면 중풍(中風)증의 풍사(風邪)가 원인이었고 계지탕이 풍사(風邪)를 제거했으니 나았다. 식이라던가
평위산을 주었더니 나았다 하면, 식적(
食積)이 있었는데 평위산이 식적을 깨부쉈으니 나았다.

연교패독산을 주었더니 나았다 하면, 풍열(風熱)증이 있어서 나았다.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중풍증, 식적증, 풍열증은 계지탕, 평위산, 연교패독산이 치료할 수 있는 다양한 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기존이 한의학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평위산의 창출 후박 진피 감초. 이것들이 꼭 식적만 치료하나요? 습증(濕症)도 치료하고, 감기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꼭 향부자 소엽이 들어가서 향소산과 같은 처방이 되어야만 감기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지탕 역시 태양중풍증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중풍증이 아닌 일반 잡병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연교패독산이 풍열증을 치료한다고 하는데, 약재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신온한 계열의 약들이 더 많습니다. 
평위산을 먹어서 나으면 식적, 곽향정기산을 먹어서 나으면 위장형감기. 이런 식의 완벽한 구분은 없습니다. 이진탕 대신에 평위산을 복용한다고 해서 담음(痰飮)증 잘 안 나을까요?
어떤 병증을 다스리기 위해서 처방을 만들었지만, 실제로 그 처방이 다스릴 수 있는 증(
證)은, 그 목적 이상으로 다양한 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죠.

(상한론의 내용은 주로 장티푸스류의 급성 감염성 질환 다루고 있지만, 상한론에 나온 처방들이 급성 질환, 감염성 질환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한론 처방이 치료할 수 있는 다양한 치료범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편집자 주)


이에 더 나아가서, 우리가 신온한 약 계열이라고 보는 곽향정기산 오적산 등을 써서 찬바람쐬고 나서 발생한 감모증상을 다스렸더니, 나았다하면 우리들은 寒에 傷한 것을 따뜻한 약으로 다스렸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마치 상한 음증을 다스린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와 같은 것은 기존 육음적(六淫的) 병인관에 입각한 시각이기에 그렇게 설명한 것이고, 무언가 상부나 밖으로 이동하면서 그곳에 정체 병변을 만들고 있기에 ‘風’을 상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주로 작용하는 약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풍(風)을 상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이 불편하니 그곳의 정체를 푸는 약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 중간에 풍사(風邪)가 있으니 그 風邪를 제거한다는 식의 논리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 한의학은 모든 것을 이렇게 중간에 ‘六淫’이나 기타 사기(邪氣)를 집어넣었습니다.
풍사(風邪)와 한사(寒邪)는 가상의 사기이지, 실존의 사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한론>을 비롯한 <내경>에서 이러한 가상의 사기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 설명이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 최병권, 장중경코드3, pp.109-110, 의성당, 2010


하지만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개념으로 현실의 복잡다단한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면, 많은 모순이 생기고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진열가한(眞熱假寒)이니 인화귀원(引火歸原)이니 한열착잡(寒熱錯雜)이니...

모호해지고 애매해지고 뭔가 오묘하고 비밀스러워지는 것이죠. 

진리들은 알고 나면 대체로 간명합니다. 모르면 말이 많아집니다.


병인(病因)을 버리면, 버려야만 비로소 사람들은 실체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도대체 지금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렇게 해서 얻어진 진실은 매우 쉽고, 직관적으로 현상을 설명할 수 있고, 재현성있게 응용이 가능합니다.

병인(病因)만을 잡고 있으면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소양병(少陽病)은 소시호탕으로 주치한다. 이것은 정확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 말은 소시호탕이 치료하는 질병이 모두 소양병이라는 말이 아니다. 

소시호탕은 소양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소양병 범주에 속하지 않는 매우 많은 병증도 치료할 수 있다. 
소양병(少陽病)은 소시호탕이 치료할 수 있는 병증 중의 하나일 뿐이다.
- 배영청, 상한론 임상응용 50론,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