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장중경코드1을 읽는다고 하니 갑자기 옛 생각에 눈물(?)이...^^
복치학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약징(藥徵)도 외우고, 상한론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하지만 뭔가 갈증도 커져갈 무렵...
그러니까 본과 2학년이던 2008년 여름. 장중경코드1·2를 펼쳤습니다.
길익남애(吉益南涯)의 상한론정의(傷寒論正義).
뭐 이런 책이 있지? 이해가 안 가는 한의학책이 있을 수 있나...
본경소증(本經疏證). 본초문답(本草問答). 의역통설(醫易通說). 어려운 책 많습니다. 하지만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저는 음양(陰陽)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역학(易學)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내용을 그냥 수긍하면 안 읽히는 한의학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다릅니다. 뭔가 논리적인 구조가 있는데,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한 학기 내내 끙끙대면서 책을 뒤적이지만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INTP의 직감으로 이 책은 거짓말은 아닙니다.
좋다. 조문이고 뭐고 결국 처방을 알면 끝나는 거 아니냐.
길익남애의 의론을 집대성했다는 방용(方庸)과 기혈수약징(氣血水藥徵)을 이해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됴쿄 대학 화상(image)자료실과 기타 일본 대학 도서관을 뒤져서 방용(方庸)의 여러 판본을 구해서 대조하면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이해를 못해도 일단 끝까지 간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2008년의 겨울은 그렇게 지루한 작업을 하면서 노트북 앞에서 폐인처럼 지냈습니다. 봄이 왔습니다. 방용(方庸)을 모두 정리하고 상한론정의(傷寒論正義)를 다시 읽습니다. 조금씩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는 부분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습니다. 이걸 계속 공부해야 하나? 도대체 1년 동안 내가 뭘 한거지...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인가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우연히 故김왕호 선생님의 『병과 약, 기, 혈, 수가 연계되는 과학론. 기혈수론(氣血水論)』「부제: 물질이나 기계를 만들고 고칠 수 있는 이치나 우주(宇宙)와 인간생명체가 생성되는 원리가 인간생명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이치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책을 만나게 됩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동안의 좌절과 갈증 때문이었겠죠. 정리하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김왕호 선생님 덕분에 계지탕(桂枝湯)을 이해하게 되고, 오풍(惡風)과 오한(惡寒)의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방용(方庸)과 상한론정의(傷寒論正義)를 펼칩니다.
그리고 다시 여름이 오고 몰입의 폐인생활은 계속됩니다. 무더운 여름밤 새벽, 대청룡탕과 월비탕과 마행감석탕의 기전과 세 처방의 유기적인 관계를 기혈수론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깨달은 내용을 적어가면서 느꼈던 기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한의학의 이천년 역사상 이 처방을 제대로 해석한 사람은 길익남애(吉益南涯) 선생 이후로 내가 처음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길익남애의 기혈수론과 김왕호의 기혈수론은 분명 다릅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김왕호 선생님의 책은 사실 흠이 많은 책입니다. 하지만 두 분과의 만남은 제 생애에서 가장 멋진 만남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이해하는 약물(藥物)이나 처방(處方)보다는, 이해하지 못하는 약물이나 처방이 더 많지만 제 공부는 계속 진행 중입니다. 더디가거나 돌아가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공부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하게 되지만, 그것조차도 공부의 과정입니다. 오늘도 방용(方庸)을 읽습니다. 이제 겨우 4년째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길익남애 선생보다도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감히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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