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총경절(大塚敬節) 선생께서 공부하신 길.
23년간 한 우물만...
일본의 한방은 덕천(德川)시대가 되면서 몇 갈래의 유파가 생겼다. 그 중의 주류는 고방파와 후세파, 절충파이다. 탕본구진(湯本求眞) 선생은 소화(昭和)시대를 대표하는 고방(古方)의 대가였으므로 나는 선생에게서 고방을 배웠다. 고방파에서는 한말(漢末)의 의서인 “상한론” “금궤요략”만 연구하면 당송(唐宋)이하의 잡서(雜書)는 볼 필요가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래서 처음 23년간 나는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한방의 근간인 고전(古典)에 친숙해질 수가 있었다. 이렇게 면학초기에 잡학(雜學)을 하지 않고 오로지 “상한론”에 전력을 투구할 수 있었던 것은 탕본구진 선생 덕분이었다.
그러나 내게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상한론” “금궤요략”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당송(唐宋)이하의 의서가 모두 무용지물인가? 연구해 볼 가치도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런 의문을 가슴에 묻어두고 고민하던 차에 나의 한학(漢學)선생이던 권등성경(權藤成卿)선생에게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들었다. “군(君)은 고방가라고 하는데 고방에는 배타벽이 있다. 이런 것이 고방의 단점이라고 군(君)은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폐부(肺腑)를 찔린 듯이 놀랐다. 고방만을 옳다고 하고 후세방을 배격하는 태도는 근대서양의학을 옳다고 하고 한방의학을 배척하는 태도와 다를 것인가. 나는 깊이 반성하였다. 당·송·금·원·명·청의 서적은 말할 것도 없이 덕천(德川)시대의 후세파, 절충파의 저술도 읽어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龜井南溟의 의잠(醫箴)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 하고 외쳤다.
의학에 고방(古方)이다 금방(今方)이다라는 구별은 없다. 병을 치료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고방일변도에서 해방되었고, 후세파, 절충파의 우인(友人)들과도 교류하여 나의 약낭(藥囊)을 살찌우게 되었다.
- 대총경절, 한방치료30년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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