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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이야기

한의학계의 과학 콤플렉스

by 키다리원장님 2013. 2. 25.

10년이 지났지만, 대단한 명문이죠.

 

한의학계의 과학 콤플렉스

최종덕(상지대 교수, 자연철학) 과학사상 2003년 겨울호 수록

 

0. 무엇이 문제인가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의학은 한약분쟁의 여파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지 못하다. 그 원인은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합리적 답변과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이에 대한 문제해결은 한의계 스스로 동양의학의 역사적 문맥을 되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은 그 역사적 문맥을 찾기 위한 자성(自省)과 구체적인 현실비판에서 쓰여졌다.

 

1. 한의학의 성장 동력은 자체 동력이 아니었다

7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한의학은 그 외형에서 엄청난 발전 속도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성장하였다. 그러한 성장 동력은 대체적으로 보아 다음의 네 가지 사회적 변화에 기인한다. 

(1) 우선 대학교육의 제도적 측면에서 한의과 대학이 구제도에서 벗어나 양의과 대학과 유사한 편제를 정착시켰다.

(2) 급속한 물량주의에 기반한 물질적 풍요로움은 상대적으로 인간 상실의 소외 현상과 원인모를 성인병 증가를 수반하였고, 이에 따라 건강 신드롬 현상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3)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심리적 바이러스는 오도된 민족주의의 전염병을 낳았고 이에 따라 반성 없는 복고 스타일의 회귀적 동양학 유행이 불게 되었다.

(4)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경제구조에 따른 위기감은 직업으로서의 한의사 직종에 대한 강한 사회적 프리미엄을 양산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한의과 대학의 입시 성적이 기존의 성적 서열구조를 더욱 더 확고히 만들었다.

 

2. 한방계의 급속한 성장은 한약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동력은 너무나 급속한 변화의 결과로서 기존의 사회구조와 충돌되는 몇몇 현상이 나타났다. 그 충돌현상의 시초는 한의과 대학의 교육제도를 양의과 대학과 유사하게 만든 데서부터 유래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한약학과라는 새로운 학과가 탄생하여 의과 대학과 약학 대학의 기존의 병립구조를 모방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런 제도적 변화는 기존의 의료서비스 시장 잠식을 우려한 기성 의약계의 반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의약분업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반감은 드디어 강력하고도 심각할 정도의 반발을 유발하였다. 결국 한의과 대학 교육편제의 변화와 의약분업 제도의 도입은 우리 사회를 꽤나 들썩이게 한 한약분쟁을 일으키게 된 주요배경이 되었다.

 

3. 분쟁의 명분은 한의학의 과학성 여부였다

한의대 교육편제와 의약분업 도입은 제도적 측면에서 세계적인 조류와 국민의 건강 권리권이라는 명분과 당위를 지닌 것이어서 분쟁의 촉발자인 의약업자 당사자는 해당 문제를 직접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논리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적 문제를 회피하고 한의학 자체가 지니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고들었다. 그 점이 바로 한의학의 과학성 여부였다. 그래서 의약계는 한의학이 과연 과학적인가를 회의적으로 질문하면서 대대적인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세에 대하여 한의계 내부에서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한의계의 답변은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너희만 과학이냐? 한의학도 과학이다’라는 내용 없는 명제만을 갖고 대처했을 뿐이다.

 

4. 따지고 보면 밥그릇 싸움이었다

이러한 대치 상항은 상당히 오래 갔다. 그리고 지금도 이 문제는 풀리지 않은 상태이며 앞으로도 꽤 길게 논쟁이 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의 궁극적 기반인 한의학의 과학성 여부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메아리 없는 목소리만 높아갈 뿐이다. 그래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이 문제를 보아야 한다. 그 다른 시각이란 과학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아주 유아적인 예를 들어보자. 두 사람이 ‘배가 있느냐’라는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자. 이럴 경우 배라고 하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일단은 동일해야만 이 논쟁은 계속될 수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물위에 뜬 배를 의미하고 다른 사람은 먹는 과일 배를 의미했더라면 이 논쟁은 아예 논쟁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다. 심하게 말해서 한의학의 과학성 논쟁은 이와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의학이 과학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과학에 대한 의미와 철학적 지칭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하고 해야만 문제 해결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쟁은 그런 반성적 작업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소모적인 논쟁, 밥그릇 싸움의 논쟁만이 난무했던 것이다.

 

5. 증거주의 과학이 과학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면 과학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기존 과학 논쟁에서 말하는 과학의 내용을 살핌으로써 논쟁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존의 과학이라는 내용은 간단히 말해서 결정론적 인과율을 찾아가는 실험실 안의 실험방법론에 국한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철학에서는 증거주의 또는 검증주의 실험방법론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의 과학주의는 이미 지나간 오랜 과학철학 교과서에서나 나왔음직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주의 실험방법론이 '과학이 무엇이냐'는 정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과학에 대한 선입관이 너무나 강하여 과학을 오로지 다양한 자료를 실험하고 측정하고(귀납적 방법론) 어떤 이론으로 일반화시켜 이를 다시 개별 사태에 적용하는 것(연역적 방법론)으로만 생각한다면 자연 현상이 품고 있는 엄청난 자연의 비밀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이런 태도는 전형적인 인간 이성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일 일뿐이다. 예를 들어 인삼을 아무리 화학분석해보아도 인삼의 효능이 여전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양약에서도 그 직접적 효능 외에 그 약리현상이 어떤 부작용을 일으킬지에 대한 인과작용의 관계가 밝혀진 약제는 아주 드물다.

 

6. 징코민 논쟁은 또 하나의 과학성 논쟁 이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징코민 논쟁을 사례로 보자. 징코민은 독일 제약회사가 동북아 지역 은행잎에서 찾아 낸 획기적인 약리효과의 성분으로 밝혀졌고, 이를 약제화한 세계적인 상업적 히트 상품이기도 했다. 그런데 올 해 봄 과학학술지로 명성을 얻고 있는 『Science』 지에 징코민 약효에 대한 반박논문이 게재되었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징코민의 약효가 있기는 하지만 허브 차 한 잔 마시고 있을 수 있는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징코민의 효과는 허상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렇게 반론을 제기한 과학자는 물론 징코민에 대한 과학적 성분실험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래서 은행잎의 약제화는 비과학적 현상의 전형이라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징코민의 제약회사 측은 입장이 달랐다. 우선 상당 수준의 임상 실험을 거쳐 그 약리효과를 입증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치료 진전이 없었던 기존의 화학 성분 약제 복용 환자들에게 부작용이 없는 최대의 약효를 이미 검증했다는 것이다. 이 두 입장을 살펴 볼 때 입장 차이가 분명해진다. 한 쪽은 화학적 성분실험의 결과 징코민 성분이 혈액순환에 관한 그 어떤 인과 작용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옹호론자들은 그것의 화학성분이 화학구조식으로 인과작용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서 인과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실험과학의 지나친 횡포이며 또한 아주 좁은 의미의 실험태도라고 항변한다. 최소한 임상의 측면에서 은행잎에서 징코민 성분이 추출되었으며 징코민 성분은 분명히 혈액순환 개선에 도움이 되는 임상효과를 증명했다고 한다. 물론 그 임상결과를 공개했다.

 

7. 한의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징코민에 대한 논쟁적 두 입장은 우리 한의학의 과학성 논쟁과 매우 긴밀한 접근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의약계 비판의 핵심은 한방 진단의 방법론이 물리적 인과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리적 인과성이란 구체적이고 지칭 가능한 어떤 질병 원인의 대상이 존재하여 그 대상이 인체의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과 결과의 기계론적 통로를 제공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진단 기준에 따르자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변증논치(辨證論治), 사상진단(四象診斷), 승강부침(升降浮沈) 등의 진단논리는 일체의 물리적 인과성 범주에 속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한방 진단방식은 비과학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병의 원인을 8가지로 분석하여 그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시도하는 변증에는 8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음, 양, 허, 실, 한(寒), 열(熱), 표(表), 리(裏)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류의 증상 진단은 일종의 수사학에 지나지 않는 원시적 접근이라고 비판한다.

둘째 진단에 따른 처방의 내용이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뜸, 침 및 약 처방 모두를 말한다. 뜸이나 침 처방이 의존하는 경락 구조는 일종의 누적된 경험치술, 혹은 주술적 심리효과 좀 더 긍정적으로 말한다고 하여도 해도 우주론적 사유의 결과일 뿐이라고 비판받는다. 그래서 그 효과는 서구의학의 연구 소산물인 압통점 효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약 처방 역시 전혀 상징과 신화의 소산물로서 질병원인을 직접 인과적으로 공격하는 물리적 유효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소갈(당뇨) 치료에 좋다는 하늘타리 뿌리는 “그 맛이 쓰고 성질은 차가우며 독은 없다”고 말할 경우, 쓴 맛의 약리적 관계, 차갑다는 것의 물리적 성질, 독이 무엇인지 전혀 그 과학적 정의가 불분명한 용어들로만 가득 차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존의 과학성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한방 관련 문헌은 전부 수사학적 표현만 있고 과학적 기술(description)은 전무하다.

 

8. 과학은 복잡하고 간접적인 인과율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과학적 기준의 협소성을 드러낼 뿐이다. 우선 과학적 기준을 가시적인 직접 인과율에만 한정한 결과이다. 임상한방이 비과학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의 치료적 유효성 때문이다. 어쨌든 부분적으로나마 치료효과가 있다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치료효과가 있다는 뜻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효과(effects)가 있다는 뜻은 비록 인과성이 밝혀져 있지 않더라도 인과성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인과관계를 우회적 인과라고 표현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 증상과 원인 사이의 직접적 기술이 당장은 어렵다고 하여도 인과관계는 존재한다. 다만 간접적이고 복잡하여 그 관계를 현재 인간의 인식수준으로는 밝혀내기 어려울 따름이다. 그래서 과학적 인과관계에는 현재 일선과학이 추구하는 직접적 인과성 외에 우회적이고 간접적이며 복잡한 인과관계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과학적이라는 수사어를 직접적 인과관계의 이론체계에만 적용하는 것은 매우 좁은 의미로 스스로를 제한한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이 바로 문제로 놓여진 과학성 논쟁에서 빠뜨린 핵심이다.

 

9. 한의계 역시 과학성 비판에 대해 동문서답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한의학의 과학성 시비에 대하여 한의계 당사자들이 적절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양방 의약계에서 비난하는 아주 좁은 의미 혹은 고전적 의미의 과학성 기준이 왜곡되어 있다는 점에 대하여 한방계는 합리적 대응을 하고 있지 못하다. 과학이라는 거대담론에 눌려버린 꼴이다. 그 이유는 한의계 역시 과학의 기준을 그런 수준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의약계의 비판에 대하여 논지를 벗어나 있는 민족의학이니, 전통의학이니 하는 동문서답 식의 다른 범주의 대답을 통하여 문제를 회피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0. 한의대 교육 역시 분석과학의 흉내만 내고 있다

현실 한의과 대학의 교육체제 역시 그런 문제회피의 모순이 여실히 드러나는 교육현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보자. 한의대 석박사 과정에서 제출되는 학위 논문주제들은 많은 경우 분석과학의 영역에 치우쳐 있다. 당귀의 약리효과, 몇몇 복합약제의 상승적 약리효과작용, 아니면 맥진의 물리적 파동작용에 대한 해석이나 특정 한약재의 화학적 성분분석 등,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한의학 소재이지만 방법론에서는 서양과학 방법론에 한정되어 있다. 나는 이런 실험과학방법론을 한의학 연구에 도입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한의학 연구 수준이 이공계 분석과학 실험실을 흉내 내거나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한 절차로 격하되는 것을 우려할 뿐이다. 현대 한의학에서 한의학 연구 범주와 분석과학 방법론 범주가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한의학은 현대과학 방법론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늉만 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흉내만 내어서는 결코 한의학의 과학성을 담보받을 수 없다. 정말 한의학과 분석과학의 두 범주가 만나려면 분석과학을 하는 한의학 연구자들이 배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주 다르다. 한의사들은 많은 경우 한의원 개원만을 하며 돈벌기에 급급할 뿐이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1. 이왕 분석과학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좁은 의미의 분석과학을 하려면 관련 전문 연구자 그룹이 형성되어야 한다. 아니면 넓은 의미의 과학성 기준을 수용하여 양방 혹은 서구과학에 병립하는 한의학 자체의 연구방법론을 구축해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분석과학을 제대로 도입하고 발전시켜 비과학이라는 외부의 비난에 대하여 당당히 분석과학의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대응하거나, 아니면 그런 비난에 대하여 과학의 범주가 과연 무엇인지를 상대로 하여금 새롭게 깨우쳐주든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범주오류 식의 대응만으로는 한의학의 지속성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 너무 뻔하다. 한국 한의학이 과연 중국 중의학만큼이나 정량화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 한의학 연구처럼 철학적 기반이 단단한 것도 아니며, 미국식의 대안의학이나 보완의학 수준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분석과학을 제대로 수용할 연구 인프라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한의과 대학 입학생의 최고 득점 수능성적에만 기대고 있는 것이니, 이는 얼마 오래가지 못할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말이다.

 

12. 그래도 한국 한의학의 미래는 그 가능성이 풍부하다

우선 일찍이 유신 때 한방제도를 없앤 일본처럼 종속현상이 없으며 중국처럼 국가주도의 정량화된 처방 시스템 부재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한국 한의학은 전통 동양의학의 원류를 오늘에 되살리는 접목의학의 높은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의학을 기존 과학적 의학의 범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어가는 문화의 종합적 장르로 인식하는 일이다. 한의학을 문화 장르로 인식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12-1. 한의학의 철학적 모태정신

첫째, 한의학의 모태정신을 현대 학문으로 구현하는 일이다. 쉽게 말해서 한의학에 깔린 철학적 우주론을 연구해야만 한의학의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한의과 교육은 양의과 대학 교육처럼 풍부한 해부 지식과 질병분석지식 등을 아무리 많이 암기하여도, 한의학의 모태정신을 흡수할 수 없다. 서구과학방법론에 근거한 분석적 지식 외에 인간과 자연을 통찰하는 철학적 우주론을 배워가야 한다. 그러한 철학적 우주론을 공부하는 일은 개인의 수양이나 고고한 형이상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나은 임상 결과를 낳기 위한 실용적 의도에서 그러하다.

사람을 진단하는 일은 기계를 진단하는 일과 달라, 예를 들어 승강부침(升降浮沈)이라는 진단 구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높고 낮음, 가벼움과 무거움, 밀도(聚散)의 차이 등등은 환자마다, 의사마다, 진단 장소마다, 그리고 계절과 밤낮의 시기마다 다 상대적인 편차를 가져오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진단 구조 이해는 의사가 사람을 이해하는 태도 그리고 해와 달의 뜨고 짐, 산과 물의 자연적 그러함을 이해하는 데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이를 어렵게 말해서 철학적 우주론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12-2. 서구과학의 긍정적 수용

둘째, 그렇다고 해서 한의학 연구 방식에 현대 분석과학 방법론 도입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의대 교육내용에서 분석과학 방법론이 필요한 교과 내용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석박사 학위논문 주제가 분석과학으로 치중된 현상이 바로 오늘의 심각한 한의과 대학 교육문제라고 생각한다. 분석기기를 제대로 운용하는 일은 실험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로 오늘날의 실험과학은 측정기기 의존도가 매우 높다. 한의대에서 생산된 실험논문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취약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재만 한방이라고 해서 그것이 과연 한의학 자체의 연구 결과물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의학이 이왕 과학이라는 기존의 틀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기존의 이공계 대학 실험절차 노하우를 빌리지 않고서도 독자적으로 국제적인 과학 학술지에 실을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12-3. 철학과 과학의 결합

셋째, 첫째 문제와 둘째 문제는 서로 충돌되는 모순관계가 아니다. 한의학은 첫째 연구 그룹과 둘째 연구 그룹을 공존의 관계로 존속시켜야 한다. 그래서 첨단의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에서 한의학은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과제를 병립시켜야 하는 과부하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부하라고 해서 회피할 경우 한의학의 존속은 오래갈 수 없으며 기존의 과학 패러다임으로 포획될 것이 분명하다. 결국 한방은 양방 시스템으로 귀속된다는 말이다.

 

13. 한의학은 동서 문화의 접합체일 수밖에 없다

이 세 가지 문제는 결국 한의학을 문화의 한 장르로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깨닫게 한다. 과학성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는 사실 과학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의학계가 우선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선취(先取)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에 대하여 지금처럼 조급한 대응이 아닌 의연한 태도로 대처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의계 내부에 내재되어 있는 과학 콤플렉스는 자연스레 소멸될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의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현재 비판이 되고 있는 과학성 여부의 문제나 그것의 예방의학적 임상 가치에만 국한하여 볼 때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 서구과학과 기술이 세계의 경제구조와 문화 양식을 지배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은 당연한 역사적 흐름일 수 있다. 현대성이라는 구조에서 대부분의 동양 전통 기술 영역은 이미 사라지거나 그 힘을 상실하였다. 농업사회의 근본인 농사 절기를 맞추어 준 전통 천문학이 사라지고, 전통 토목기술 역시 서구 기계기술에 의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산술법이나 항해술도 그 실용가치에서 서구의 것에 밀렸다. 연단술은 서구 화학에 밀렸고, 과거에 당당했던 화약이나 종이 그리고 도자 제조기술도 이제는 역사책에서나 유명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동양의학은 굳건히 존속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의학이 살아남은 이유도 나름대로 존재한다. 최소한 임상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방의학이나 부분적인 치료의학에서 말이다. 우리는 한의학의 이러한 역사적 문맥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맥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할 경우 한의학을 민족주의 옹호론의 도구적 방편으로 이용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자주 보곤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의학을 옹호할 경우 한의학은 얼마가지 못해 그 존속을 그치고 말 것이다.

한의학의 문제는 단순히 임상적 가치나 전통 사상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동서의 문화적 종합을 이룰 수 있는 문화적 매개자로 접근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서구 인류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의학이 주술사의 치료기능에서부터 발전된 것만은 아니다. 동양의학은 앞서 이미 말했지만 동양 내적인 철학적 자연관을 함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서구사상사에서 자연은 인간과 대자적이며 동시에 대상화된 개념이다. 그러나 동양에서 말하는 자연은 대상화시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렇게 스스로 있는’ 아니면 ‘그로부터 그렇게 있는’ 자연(自然)한 것이다. 중심이 없지만 항상 어디에나 나와 함께 있어 어느새 자연인지 인간인지 모르지만 바로 모든 것이 자연 아닌 것이 없는 그런 자연함이다. 이러한 자연의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한의학을 바르게 통찰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 없이 한방 처방전 암기를 아무리 잘 해보아야 한의학의 진정한 발전에는 도움 되는 것이 없다.

 

14. 한의학은 사회에 대한 역사적 통찰을 요구한다

여기서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이 숨겨져 있다. 앞서 말한 통찰은 철학적 자연주의에 대한 통찰일 뿐이다. 이런 철학적 통찰에 그치면 한의학은 허황된 학문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한의학은 자연관에 대한 통찰 외에 인간사회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 이 점이 한의학을 문화의 한 장르로 보아야 한다는 뜻의 핵심이다. 한의학의 자연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 사이의 연속성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사회 영역을 빠트리고 한의학을 말 경우 한의학의 정체성은 분석과학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마치 우주론적 사유구조의 한 부분이 한의학의 전체인 양 오해받기 쉽다.


14-1. 사회 인식의 문헌적 사례 1

한의학의 정체성은 인간과 자연간의 자연주의적 연속성을 내포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체-사회-자연의 연속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자연주의의 구조는 이미 『황제내경(黃帝內徑)』의 자연관 모형에서부터 발단되었다. 예를 들어 자연의 지리, 기후의 변화는 인체에 영향을 주고, 동시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풍토, 역사, 그리고 사회적 관습에까지 영향을 준다. 동의보감 내경편(內景篇) 제1권에서는 “사람의 몸은 하나의 나라와 같다”라고 한다. “人身猶一國”

이 내용은 실제로 포박자(抱朴子)의 글을 인용한 것이지만 동의보감 전편에 흐르는 자연주의 인간관의 한 단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의 몸은 한 개 나라의 형태와 같다. 가슴과 배 부위는 궁실과 같고 팔다리는 도회 변두리(郊境)와 같으며 뼈마디는 모든 관리들과 같다. 신(神)은 임금과 같고 혈(血)은 신하와 같으며 기(氣)는 백성과 같다. 자기 몸을 건사할 줄 알면 나라도 잘 다스릴 수 있다. 대체로 백성들을 사랑함으로써 그 나라가 편안할 수 있으며 자기 몸의 기를 아껴 쓰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백성이 흩어지면 그 나라는 망하고 기가 말라 없어지면 몸은 죽어 버린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고 망한 나라는 온전한 나라로 회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재난을 미리 알고 막아내며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하고 일이 생기기 전에 대책을 세우며, 이미 잘못된 후 그것을 따라 추궁하지 않는다. 대체로 사람들을 키우기는 어렵지만 위태롭게 하기는 쉬우며, 기는 맑아지기는 어려우나 흐려지기는 쉽다. 그러므로 권위와 은덕을 잘 배합해야 나라를 보존할 수 있으며 지나친 욕심을 버려야 혈기를 든든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진기가 보존되며 정기신(精 氣 神) 3자가 통일되어 온갖 병을 미리 막을 수 있고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였다.” 동의보감, 여강출판사, 內景篇 1권, 8쪽.


14-2. 사회 인식의 문헌적 사례 2

또한 『소문(素問)』의 인용을 보면 오장육부와 행정 직제를 직접 연관시키고 있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심(心)은 군주지관(君主之官)이라고 하는데 신명(神明)이 여기서 생긴다. 폐(肺)는 상부지관(相傅之官)이라고 하는데 제도와 절차가 여기서 생긴다. 간(肝)은 장군지관(將軍之官)이라고 하는데 꾀와 묘책이 여기서 생긴다. 담(膽)은 중정지관(中正之官)이라고 하는데 결단성이 여기서 생긴다. 단중(膻中)은 신사지관(臣使之官)이라고 하는데 기쁨과 즐거움이 여기서 생긴다. 비위(脾胃)는 창름지관(倉廩之官)이라고 하는데 5가지 맛이 여기서 생긴다... 이 12가지 기관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잘해야 아래 기관도 편안하게 된다. 이것을 알고 양생하면 오래 살면서 죽을 때까지 위험한 일이 없게 된다. 또한 이렇게 나라를 다스리면 크게 번영하게 된다. 심이 제 작용을 잘하지 못하면 12가지 기관이 위태롭게 되고, 돌아가는 길이 막혀서 잘 통하지 못하면 형체가 몹시 상하게 된다. 이렇게 양생하면 재해를 입는다. 나라도 이런 식으로 다스리면 그 기초가 아주 위태롭게 되므로 또 경계해야 한다.” 소문, 영란비전론편(靈蘭秘典論篇), 재인용: 동의보감, 여강출판사, 內景篇 1권, 9쪽.

 

15. 의료 행위는 사회적 문화 행위이다

여기서 인용한 부분을 통해서 인간과 사회가 동형구조라는 직접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한의학에서 말하는 의료 행위는 단순히 신체에 대한 의료지식으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한의학의 철학적 우주론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결국 한의학은 의료 주체가 속해있는 사회에 대한 사회인식이 분명해야 하는 과제를 더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의학을 문화의 한 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16. 과학 콤플렉스는 허상이다

결국 오늘에 이어지는 한의학은 단순히 분석과학의 위세에만 짓눌려 있을 것이 아니라 한의학에 내재된 철학적 우주론과 사회적 역사 문맥을 함께 통찰하는 인식이 요구된다. 따라서 한의학을 분석과학의 기준으로만 보려는 비판적 견해들, 그리고 그러한 비난에 종속되어 한의학의 우주론과 사회적 인식을 놓치고 마는 한의계의 태도들은 모두 한의학의 원류와 미래를 동시에 잃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한의학이 갖는 과학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면 분석과학을 포용하지만 그 포용은 한의학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라는 의연한 역사인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한의학은 이제 과학 공부와 함께 철학적 사유 및 사회적 참여를 연습할 때 비로소 과학 콤플렉스의 허상을 깰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