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일반적으로 이 질문은 환원주의 과학을 비판하는 명제로 유명합니다만, 지금 제가 이야기하려는 내용에서는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례를 같이 읽어보시죠.
환자의 주소(主訴)는 잦은 감기(단체생활증후군)였습니다. 시호계지탕을 처방했구요, 시간이 지나면서 감기에 덜 걸리고 양방의 감기약, 항생제를 거의 복용하지 않고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례는 한의원에서 너무 흔하게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구요, 아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구토(嘔吐) 증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http://yourmedi.tistory.com/309
시호계지탕(시호4 백작약 반하3 대조2 생강 황금 계지 인삼1.5 감초1g)을 1달간 복용했지만 구토는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구토에 초점을 맞춰서 소반하탕(반하6 생강4)을 보름 복용한 후에 구토 증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례는 흔합니다.
http://yourmedi.tistory.com/188
구토와 관련한 천전종백(淺田宗伯)의 구결을 몇 가지 소개한다면,
소반하탕(반하 생강) : 이 처방은 구가(嘔家)의 성제(聖劑)이다.
대반하탕(반하 인삼 꿀) : 이 처방을 구토에 사용하는 경우는 심하비경(心下痞硬)을 목표로 한다. 먼저 소반하탕을 주어 낫지 않으면 이 처방을 준다.
건강인삼반하환 : 이 처방은 원래 임신 오저(惡阻)를 치료하는 환약인데, 료(料)로 하여 제반의 구토가 멎지 않고, 위기(胃氣)가 허(虛)한 곳에 사용하여 빠른 효과가 있다.
건강황금황련인삼탕 : 격열(膈熱)이 있어 토역(吐逆)하고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 반하, 생강 등 구토를 치료하는 약을 주었으나 눈꼽만큼도 효과가 없는 경우에 효과가 있다.
물론 이런 처방 외에도 대황감초탕이나 복령음으로 치료되는 구토도 있겠지만, 일단 이 정도가 대표적인 처방들이죠.
근데 약물 구성만으로 본다면 여기 있는 4가지 처방이 모두 소시호탕 안에 얼추 들어가 있습니다. 소시호탕 조문의 심번 희구(心煩 喜嘔)와도 관련이 있겠죠. (황련은 없구요, 생강과 건강은 용량의 차이)
시호계지탕 안에도 당연히 소반하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평소에 가진 구토(嘔吐)의 소증(素症)은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용량 차이가 있습니다만...
소시호탕이 면역계를 안정시키고 감기에 덜 걸리게 할 수는 있지만, 자주 토하는 증상은 소시호탕의 일부에 해당하는 소반하탕(반하 생강)을 따로 떼어내서 목표를 좁혀야 치료할 수 있습니다.
거담(祛痰)하는 이진탕에 이기(理氣)하는 길경지각탕을 합방하고, 거기에 또 거어혈제(祛瘀血劑)를 더하면 과연 각 부분이 처방을 만든 사람의 의도대로 작용할까요?
계마각반탕은 계지탕증과 마황탕증을 둘 다 적당히 다스릴 수 있는 걸까요? 혹 둘 다 다스리지 못하고 전혀 새로운 병태를 다스리는 것은 아닐까요?
사역산(시호 지실 작약 감초)은 과연 지실작약산과 작약감초탕이 치료하는 병태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어떤 처방의 일부를 구성하는 subset이 항상 의도하는 것처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제학 교과서에 A+B+C로 도식화된 것처럼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약의 작용기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체액의 편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부분으로 체액(氣血水)을 몰리게 하거나, 반대로 어느 부분에 몰려있는 체액의 과잉을 해소하는 편협한 성질 때문에 약으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계지가작약탕은 체액을 리위(裏位)와 하초(下焦) 부위로 편중시킵니다. 계기가황기탕은 체액을 표위(表位)와 상초(上焦) 부위로 편중시킵니다. 전자는 전통적인 보혈(補血)의 개념에 가깝고, 후자는 전통적인 보기(補氣)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또한 방증(方證)으로 규정되는 각 처방이 치료하는 독특한 병태가 있습니다.
그럼 계지가작약탕과 계지가황기탕을 합방하면 각각의 방증(方證)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을까요? 보사(補瀉)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보기(補氣)도 하고 보혈(補血)도 하니까 기혈쌍보(氣血雙補)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여기에 사물탕까지 더하면 쌍화탕이죠), 체액의 순환으로 접근하면 굉장히 조심스러워지게 됩니다. 한 처방은 체액을 하부(下部)로 보내는데, 또 다른 처방은 체액을 상부(上部)로 보낸다. 둘을 섞으면?! 글쎄요... 저는 보약(補藥)으로 쓴다고 해도, 둘을 합친 귀기건중탕보다는 각각의 처방을 오전, 오후로 복용하는 것이 마치 상하(上下)로 풀무질을 하는 것처럼 역동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합방(合方)을 할 때 처방을 구성하는 하위처방이 작방(作方)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작용한다고 섣불리 가정하면 안됩니다. 당연하게도 각 하위처방의 고유한 효능은 약화되기 마련이고, 심지어는 원래의 방의(方意)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체라는 복잡계를 고려할 때, 그것을 머리속에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축적된 임상 경험을 중시해야 합니다. 유효하지 못한 합방(合方)은 임상의 경험을 통하여 퇴출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인들이 처방을 쓸 때 그 처방의 효과 여부는 두 가지 경우에 달려있다. 처방에 효과가 있는 것은 의사 스스로가 직접 그 병증을 치료한 것으로 여러 번 경험을 했던 처방이다. 효과가 없는 처방은 대부분이 의론에서 나온 것이다."
- 의림개착(醫林改錯), 왕청임(王淸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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