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아토피 이야기는 잠시 쉬고, 얼마 전 후배랑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예과 2학년 때랑 본과 1학년 여름방학 때 공부한답시고 절에 들어갔었죠. 심지어 삭발까지 하고. 삭발을 왜 하는지 알겠더군요. 머리감기가 편해요.^^
예2 때는 중간에 나와서 의료봉사도 했었는데요, 그때 의욕만 넘치지 뭘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근데 지금 돌아보면 재밌는 게, 당시 제 치료에 대한 반응이 그 후의 어떤 의료봉사 때보다 좋았다는 겁니다. 우울증이 호전되서 눈물을 흘리셨던 아주머니, 잘 치료해줘서 감사하다고 떡도 2박스나 받고, 심지어 어떤 할머니는 너무 고맙다고 꼬깃꼬깃 때묻은 만원짜리 두장을 건네주셨죠. 아무리 안 받겠다고 거절해도 막무가내셔서 당시 책임자에게 이야기하고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만원은 아직도 제 왕진가방에 담겨있습니다.
다시 삭발을 해야 하나요?
의사가 하고 싶은 것과 환자가 받고 싶은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의사들이 하고 싶은 것의 순위는
① 치료(결과 집착)
② 자신의 존재감
③ 친절
무슨 말인지 다 아시죠? 의사들은 하여튼 치료에 목숨을 겁니다. 어떻게 침을 잘 놓고, 좋은 처방을 써서 이 환자를 낫게 할 것인가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환자가 좋아지면 그게 “내 덕분이야. 난 참 실력이 좋아...”라고 존재감을 확인하고 뿌듯해합니다. 저도 그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러스 알파로 친절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럼 환자가 받고 싶은 것의 순서는 뭘까요?
① 자신의 존재감(친절, 위로)
② 의사에 대한 신뢰감
③ 치료(결과)
이건 제 주장이 아니고 사실이예요. 의료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선 다 알려진 내용이죠. 환자들은 자신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을 가장 원합니다. 그 다음에 신뢰할 수 있는 의사면 더 좋고, 결과는 그 다음입니다.
아브라함 베퀴즈의 감동적인 강의가 이 부분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영상으로 꼭 보세요. 한글 자막 있어요.)
저는 다른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현재 ①충분히 공감하고 친절하며 ②신뢰감있는 의사라고 착각하고 오늘도 ③치료(결과)에 집중합니다.^^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구요... 다시 지리산의 절(寺)로 돌아갑니다. 당시 제가 무슨 책을 가지고 들어갔었냐면요, 이것도 역시 웃긴데요, 당종해의 본초문답(本草問答)과 중용(中庸) 그리고 여강출판사에서 나온 동의보감(東醫寶鑑) 3권을 들고 갔습니다. 예과생이 동의보감을 읽으면 뭐 압니까? 인터넷도 없는 곳이라 중용이랑 본초문답은 지겹게 읽었네요. 동의보감은 뭘 읽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구요, 지금 생각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당시 혈문(血門)에서 코피를 많이 흘렸는데 신열(身熱)이 있고 맥이 부삭(浮數)하면 예후가 나쁘고, 맥이 침(沈)하면 예후가 좋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납니다. 그 부분은 당시에 이해를 했었던 것 같아요. 피는 음(陰)에 속하니까 출혈이 있어도 많이 흘리지 않으면 아직 양(陽)이 의지할 곳이 있으니까 맥이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고, 많이 흘리면 양(陽)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 떠오르니까 열(熱)이 나면서 맥이 부삭(浮數)해지겠구나. 이후 상한론(傷寒論) 위주로 공부를 하다보니 지금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 때 읽었던 것이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위안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스님에게 칭찬받았던 부분 중 하나는, 많은 한의대생들이 방학 때 절에 와서 공부하는 것을 생각만하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군(君)은 일단 여기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책 많이 볼 생각하지 말고, 바람이나 쐬고 가라.
근데 산에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에 남는 건 공부가 아니더군요... 산에는 정말 곤충들이 많거든요. 스탠드를 켜고 책을 보고 있으면 모기는 물론 풍뎅이 같은 것들이 아주 많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같이 책을 읽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귀찮아서 손톱으로 찍어 죽이거나 손가락으로 튀겨서 뇌진탕을 일으켜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 태도가 자연스럽게 바뀌더군요. 길을 잃고 방에서 헤매는 풍뎅이를 손에 담아서 멀리 날려보내면 그 풍뎅이가 다시 날아가면서 허공에 그리는 선! 그 뒷모습이 너무 보기 좋은 겁니다. 그래서 정말 모기들을 빼고는(이놈들은 봐주기가 힘들었어요ㅠㅠ) 다른 곤충들은 조심조심 다 살려주면서 같이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됐지요. 아 사람이 산에 들어오면 착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그런 말인가보다... 욕생자생야(欲生者生也)
해질녁 노을을 배경으로 그 풍뎅이가 날아가던 뒷모습은 아직 제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있는데요, 산에 있다보니 밥 먹고 산책하는 게 일입니다. 매일 아침에 밥 먹고 한 시간쯤 산책을 하면서 어느 순간에 깨달은 건데요, 거미들은 그날 비가 오는지 안오는지 기가 막히게 예측을 하더군요. 비가 오는 날은 이놈들이 거미줄을 안치거든요. 아무리 맑고 구름 한점 없는 날도 거미줄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오후에 소나기가 옵니다. 그래서 정말 미물이지만 신통하다고 생각했죠. 근데 말이죠, 두문불출하면서 산에서 생활한 지 한달쯤 지나니까 저에게도 비슷한 감각이 생기더군요. 처음에는 전혀 감을 못 잡았는데요, 시간이 지나니까 그날 소나기가 올지 안올지를 거의 맞출 수 있게 되더군요. 하늘의 색깔, 기온, 구름의 모양 등을 보면 거의 느낌이 오더군요. 어디가 쑤시고 아파서 맞춘 것은 아니구요.^^ 저는 진화론을 믿는 사람이고,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고 배웠습니다. 아마 저에게도 거미와 같은 미물이 지닌 탁월한 감각의 원초적인 형태는 내재되어 있을 겁니다. 그 부분을 키워서 환자를 치료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한 두세달쯤. 아내에게 이야기하면 “가도 좋다. 하지만 돌아올 생각은 말아라.” 이 정도의 대답이 나오겠죠?^^
나중에 아이들 다 크면 아내와 함께 바람쐬러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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