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점치는 것'의 해악이 "불량식품"보다 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삶에는 많은 ‘우연’이 있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는 용기와 당당함이 필요합니다.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다면, 우리는 ‘우발성’을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 뱃사람들은 ‘필연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필연성을 믿는 것이 초래할 수도 있는 일종의 완고함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비와 심청 사이에는 ‘우발성’이 있을 뿐이라고 충고하더라도, ‘필연성’을 믿고 따르는 뱃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심청을 인당수에 던졌는데 비가 전혀 그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즉각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그러나 뱃사람들은 양자 사아의 관계가 우발적이라는 우리의 생각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당수에 던져 넣을 또 다른 처녀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될 것입니다. 용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다른 희생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던져 넣으려는 것일까요? 아마 인당수의 비가 그칠 바로 그 순간까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들은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봐. 역시 인당수에 희생물을 바쳐야 폭풍우가 그친다니까.”
아마 ‘필연성’을 확신하는 뱃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지금도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계속 던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에 대한 가혹한 폭력을 자행했던 모든 미신과 종교의 뿌리는 바로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필연성’에 대한 맹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맹신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은, 어찌 보면 인간의 나약함으로부터 연유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에 직면했던 뱃사람들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강력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죽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당당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했겠죠. 비록 그것이 심리적 안도감만을 가져다주는 기만적인 희생 의례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중략)
비는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기우제를 지낼 수도 있고, 지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기우제를 지냈을 때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우제를 지내는 인간의 행동과 비를 내리는 자연의 작용이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즉 그것은 하나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왕충王充(27~100)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우발성의 진리를 관철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동양철학 전통에서 필연성의 허구(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류)를 폭로하고 우발성을 사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철학자들 속에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중에서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다면, 우리는 ‘우발성’을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 뱃사람들은 ‘필연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필연성을 믿는 것이 초래할 수도 있는 일종의 완고함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비와 심청 사이에는 ‘우발성’이 있을 뿐이라고 충고하더라도, ‘필연성’을 믿고 따르는 뱃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심청을 인당수에 던졌는데 비가 전혀 그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즉각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그러나 뱃사람들은 양자 사아의 관계가 우발적이라는 우리의 생각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당수에 던져 넣을 또 다른 처녀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될 것입니다. 용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다른 희생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던져 넣으려는 것일까요? 아마 인당수의 비가 그칠 바로 그 순간까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들은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봐. 역시 인당수에 희생물을 바쳐야 폭풍우가 그친다니까.”
아마 ‘필연성’을 확신하는 뱃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지금도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계속 던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에 대한 가혹한 폭력을 자행했던 모든 미신과 종교의 뿌리는 바로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필연성’에 대한 맹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맹신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은, 어찌 보면 인간의 나약함으로부터 연유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에 직면했던 뱃사람들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강력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죽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당당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했겠죠. 비록 그것이 심리적 안도감만을 가져다주는 기만적인 희생 의례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중략)
비는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기우제를 지낼 수도 있고, 지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기우제를 지냈을 때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우제를 지내는 인간의 행동과 비를 내리는 자연의 작용이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난다고 해도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우발적인 것이라고, 즉 그것은 하나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왕충王充(27~100)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도 우발성의 진리를 관철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동양철학 전통에서 필연성의 허구(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류)를 폭로하고 우발성을 사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철학자들 속에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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