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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이야기

항온동물과 감기

by 키다리원장님 2013. 1. 17.
원래 '「생명과 전기」 서문에 나온 사례에 대한 한의학적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했는데 너무 거대한 주제라서 나눠서 써보려고 합니다.
「생명과 전기」의 서문을 읽으시려면 → http://yourmedi.tistory.com/253
 

 

먼저 감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죠. 학생 때 스터디를 할 때 어떤 선배님께서 질문을 하더군요. 자 여러분들은 감기의 원인이 한사(寒邪)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바이러스라고 생각하느냐? 제 기억에 반반이었던 걸로 생각합니다. 저는 한사(寒邪)라고 손을 들었습니다. 뭘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구요, 그냥 골랐습니다. 몇몇 논쟁이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옷을 얇게 입고 운동하면 그날 저녁에 열이 나면서 감기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한사(寒邪)라고 해야 하지 않겠냐. 바이러스는 항상 우리의 몸에 상재해 있는 것이지만 뭔가 계기를 주는 것을 병인(病因)으로 인식하는 것이 실용적이다. 그래서 “상한(傷寒)”아니냐? 하지만 한 반에서 감기(독감)에 걸린 아이들이 생기면 감기(독감)가 많이 유행한다. 이런 것을 보면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봐야하지 않겠느냐. 모두 맞는 이야기죠.

 

여러분들은 약골이 아니어서 이런 경험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옷을 얇게 입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거나, 잠깐 물건을 사러 가게에 갔을 때 어느 한 순간 “오싹함”을 느끼고 오한이 들면서 열이 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감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저는 항온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항온동물은 외부로부터 한랭충격을 받으면 체온중추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체온을 올리게 됩니다. 왜냐? 얼어죽을 수 있기 때문이죠. 초파리는 변온동물입니다. 초파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으면 체온이 낮아지고 대사율이 떨어지면서 수명이 늘어납니다. 물론 삶의 질은 많이 떨어지겠죠. 사람을 냉장고에 넣으면 어떻게 되죠? 사람은 초파리와 달리 항온동물이죠. 항온동물은 외부의 온도변화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합니다. 사람을 냉장고에 넣으면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사율을 올립니다. 변온동물인 파충류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이제 왜 그런지 쉽게 이해가 되시죠?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제가 쓰레기를 버리고 따뜻한 집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 열이 나면서 오한이 가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체온중추가 합리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거죠. 이미 위기상황은 해제되었지만 체온중추는 아직도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의학사를 살펴보시면 이렇게 발열오한이 있을 때 고대인들은 처음에는 치자, 황련 등의 고한(苦寒)한 약재로 접근했습니다. 열이 나니까 차가운 약재로 식혀보자는 매우 상식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이브한 생각이었죠. 그렇게 해보니까 안 되는 겁니다. 지금 양방의 응급실에서 하고 있는 방식이죠. 열이 나니까 물이나 알콜로 닦아서 식히면 되지 않겠냐? 실패~! (일사병이나 약물중독, 중추신경계의 외상으로 체온이 41도 이상 올라가는 경우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감기 이야기예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계지탕이나 마황탕 등 신온(辛溫)한 약을 이용해서 땀을 내면 오히려 좋아진다는 대발견을 하게 됩니다! 상한론의 효시가 되는 위대한 순간이죠. 꼭 약을 먹지 않더라도 이렇게 열이 오르는 경우 따뜻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땀을 빼면 다시 정상체온이 되면서 감기가 뚝 떨어지는 경우가 있죠. 예전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죠. 콩나물국에 고춧가루를 좀 풀어서 마시고 이불 뒤집어 쓰고 땀을 빼라. (말 못하는 불쌍한 아이들만 엉뚱한 치료를 당하고 있죠. 여러분은 오한이 나는데 누가 물수건으로 문지르면 좋겠습니까?)

내복(

內服)

이나 외치(外治)로서 열을 식히려는 나이브한 노력이 실패했던 이유는 항온동물의 체온 항상성 유지 기전이 우리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위대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염증은 살아있는 조직에서 회복을 위한 합목적적인 노력이지만, 동시에 그 염증이 너무 과도해서 제어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림 1>

  

   <그림 2>

 

변온동물의 체온유지 기전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그림 1)과 비슷합니다. X-축이 주위 기온이고, Y-축이 체온(대사율)입니다. 주위 기온이 떨어지면 체온은 자연스럽게 떨어집니다. 항온동물의 체온유지 기전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그림 2)와 비슷합니다. 아주 평화로운 원점(0,0)에서 출발합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서 외부의 낮은 기온을 피부로 느낍니다. 

X-축에서 왼쪽으로 따라가 보세요. 

순간 

“오싹함”을 느끼고 

한랭충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사율을 올립니다. Y-값(체온)이 올라가지요.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외부 기온이 원래대로 회복됩니다. X-축 상에서 0점으로 돌아오는 것이죠. 제가 도마뱀이었다면 그래프는 다시 자연스럽게 원점(0,0)으로 이동하고 체온도 정상이 됐겠죠. 하지만 저는 도마뱀이 아닙니다. (그림 2)의 X-축을 따라서 다시 0점으로 이동해도 Y값(체온)은 여전히 (+)값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발열이 지속되는 상황입니다. 이제 이 체온(Y값)을 떨어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죠. 그래프를 보시죠. 이제는 외부 온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Y값이 떨어지게 됩니다. 계지탕이나 마황탕이나 콩나물국을 마신 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땀을 내는 과정을 그래프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뭐냐면, 우리의 체온중추는 일단 한랭충격을 받으면 얼어죽지 않으려고 겁을 먹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위 기온이 원래 온도로 돌아와도 계속 가드를 내리지 않는 겁니다. 겁먹은 체온중추의 가드를 풀기 위해서는 한랭충격이 아닌, 치자나 연교나 금은화가 아닌, 알콜이나 물스펀지가 아닌 “온열충격”이 필요합니다. 사우나에 가서 충분히 지져주거나 이불을 푹 뒤집어 쓰면 그제서야 체온중추는 ‘아 이제 얼어죽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가드를 내리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시스템을 공학에서는 히스테리시스(hysteresis)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이력(履歷)현상이라고 부르는데, 번역을 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한국말이죠. 이력서(履歷書)랑 같은 단어입니다. 혹시 관심있으시면 http://en.wikipedia.org/wiki/Hysteresis 을 읽어보시면 되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감염이 아닙니다. 바이러스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24시간 정도 해소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으슬으슬 추우면 마황탕을 먹고 땀을 빼라고 했는데, 이 친구가 말을 안 듣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냥 잠이 듭니다. 체온은 올라가고 상기도의 점막에서는 수분증발이 늘어납니다. 시간이 지나면 상기도의 가장 중요한 방어기전인 점액-섬모 방어기전(muco-ciliary defense mechanism)이 손상됩니다. 상재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드디어 활성화되고 점막세포에 감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기는 초반에 떼어버리지 못하면 이제 감기의 자연사를 벗어나기 힘들게 됩니다. 1~2주일 앓게 되는 것이죠.

 

근데 감기로 무슨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하냐구요? 어차피 물만 먹어도 낫는 질병인데요. 그렇게 따지면 장티푸스와 콜레라에 대한 진료기록부인 상한론(傷寒論)은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한(傷寒)이 감기가 아닌 것은 주지의 사실이죠. 감기로 장출혈이 일어나고(도화탕증) 10명중 7명이 죽지는 않습니다. 항생제와 링거가 있는 요즘 장티푸스와 콜레라는 무서운 병이 아니죠. 하지만 항생제 없이 그런 무시무시한 감염성 질환을 치료했던 상한론에서 우리는 인체를 바라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항생제가 발달했다고 해서 상한론이 과거의 의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염증에 속발하는 과도한 압력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 기록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장티푸스나 콜레라를 넘어 마황탕으로 감기와 아뇨를 치료하고, 계지가작약탕으로 설사와 아토피를 치료하고, 반하후박탕으로 틱과 간질을 치료하고, 시호계지탕으로 두통과 전환장애를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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