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dy Electric; Electromagnetism and the Foundation of Life, Morrow, 1985
생명과 전기, 로버트 베커(정형외과 의사), 공동철 역, 1994, 정신세계사
서문 - 의술의 미래
페니실린이 나오기 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나는 의과대학 학생이었는데, 그때는 이 약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다. 그때 뉴욕의 벨뷰 Bellevue 병원의 병실은 겨울마다 환자들로 차서 넘치고 있었다. 비잔틴 풍의 벨뷰병원은 네 개의 블럭에 걸쳐 있었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고색창연한 그 건물들은 좁은 각을 이루면서 꽉 들어차 있었으며 토끼사육장 같은 지하의 미로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전쟁 중의 뉴욕은 노동자, 선원, 군인, 술주정뱅이, 피난민 그리고 세계 각처에서 흘러 들어온 질병들로 들끓고 있었다. 뉴욕은 마치 모든 교과과정을 포함한 의학교육 장소 같았다. 벨뷰 병원은 아무리 환자들로 넘치더라도 입원 치료를 필요로 하는 모든 환자를 수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병실 안의 통로는 물론 바깥의 복도에까지 침상이 꽉 들어차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침상을 꺼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서야 환자를 받지 않았다.
이 환자들 대부분이 폐렴을 가지고 있었다. 폐렴은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다. 박테리아는 헤아릴 틈도 없이 불어나서, 폐로부터 혈관으로 침투하였다. 첫 징후가 나타난 후 3일에서 5일 내에 위험한 순간이 닥쳐왔고 열이 섭씨 40도까지 올라가서 혼수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징조에 익숙해 있었다. 환자의 피부가 계속 뜨겁고 건조하면 그 환자는 죽었다. 땀을 내는 환자는 어떻게든 극복을 하여 회복되었다. 다소 약한 폐렴에 대해서는 설파Sulfa제가 효과가 있기도 했었지만, 대개 결과는 전적으로 환자와 질병과의 투쟁에 달려 있었다. 새로운 의학지식으로 자신감에 차 있었던 나는, 이 질병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는 전율하였다.
당시 상황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페니실린이 가져온 변화가 잘 실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거의 50%에 달하는 치사율을 가졌고, 매년 거의 십만명의 미국인을 죽였으며, 가난한 자나 부자 또는 늙은이나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고, 아무런 대비책이 없던 그 질병이 소량의 하얀 가루를 투입함으로써 불과 몇 시간 만에 확실히 치료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이후 대학을 졸업한 의사들 대부분은 악화된 폐렴을 전혀 구경조차 하지 못하였다.
실제 의료에 있어서 페니실린이 끼친 영향도 지대하였지만, 의학 철학에 미친 영향은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배양된 박테리아를 푸른 곰팡이가 죽인다는 것을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우연히 관찰하였을 때, 그는 과학적 의학에 있어서 놀라운 발견을 한 셈이었다. 세균학과 공중위생이 저 무시무시했던 흑사병을 이미 정복한 바 있었다. 이제 페니실린과 뒤를 이어 나온 항생제들이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침략자들을 격퇴한 것이다.
페니실린은 또한 19세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던 의학상의 변화를 완성시켰다. 그 이전까지의 의학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작품(치료)은 환자의 의지와 수천년의 시행착오로부터 얻어진 의사의 직관과 기술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의학은 점점 과학에 가까워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화학이라는 과학의 한 응용분야가 된 것이었다. 의료 기술은 그 경험적 결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당대의 생화학적 개념(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시험을 거쳐야만 했다. 의료 기술이 설사 효과가 좀 있다 할지라도 생화학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으면 사이비 과학이나 명백한 사기로 간주되어 배척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생명 자체도 순전히 하나의 화학적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생명체를 비생명체와 구별짓는 미묘한 그 무엇인 영혼 또는 생명력을 발견하려는 시도들은 실패했다. 세포 내에서의 변화무쌍한 활동에 대한 지식이 늘어남에 따라, 생명 현상도 엄청나게 복잡하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실험실에서 행해지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일련의 화학반응들로 간주되었다. 화학적인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질병은 적당한 화학적 치료제로써 가장 잘 치료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인 듯 생각되었다. 페니실린이 인체 세포에 해를 끼치지 않고 세균들을 몰아내는 것이 그 좋은 예였다. 몇 년 뒤 DNA 유전정보가 발견되고 해독됨으로써 그것은 화학적 생명 현상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어, DNA의 이중나선은 우리시대에 있어서 가장 매혹적인 상징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원자 자체의 불변성 외의 어떠한 지도 원리도 없이 분자의 우연한 결합에 의해 40억년 동안 진화해 왔다는 최후의 증명으로 보였다.
화학적 의학의 성공에 대한 철학적인 결과는 기술적 난관 극복에 대한 신념으로 표현되었다. 약품들은 모두 병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또는 유일한 치료수단이 되었다. 예방, 영양, 운동, 생활방식,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개성, 환경오염 등의 모든 변수들이 무시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몇년 동안 수백만 달러의 돈을 별 성과없이 날려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은 여전히 암 치료는 건강한 세포에 해를 입히지 않고 암세포들만을 죽일 수 있는 화학물질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외과 의사들이 신체 구조들을 수리하고 또한 그것을 인공적 부분으로 대치하는 데 익숙해짐에 따라, 기술에 대한 신뢰는 이식된 신장, 플라스틱 심장 밸브, 또는 스테인레스 스틸 테플론으로 된 관절 등이 원래의 것만큼 잘 작동하며 그것들은 거의 마모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더 잘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육백만불의 사나이 같은 인공적 초능력 인간에 대한 아이디어는 페니실린의 환희 이후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만약에 인간이 단순히 하나의 화학적 기계라면, 완벽한 인간은 로봇인 것이다.
페렴과 그 밖의 수많은 전염병의 쇠퇴를 목격했거나, 죽어가다가 새로운 심장 밸브 덕분에 10년을 더 살게 된 환자의 눈을 본 사람이면 아무도 기술의 유용성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발전이 다 그렇듯이, 여기에도 대체 불가능한 귀중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바로 의학의 휴머니티이다. 기술적 의학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이나 유일성 같은 것은 고려될 여지가 없다. 환자 자신의 치유력이나 그것을 개발하는 방법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생명을 화학적 자동장치로 다루는 한, 의사가 환자에 대해 걱정을 해준다든지 또는 환자가 의사를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의학이 남겨 놓은 것 때문에, 우리는 이제 진실로 우리가 기술적 난관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벽한 건강과 연장된 수명이라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약속은 공허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퇴행성 질환들(심장마비, 동맥경화, 암, 뇌일혈, 관절염, 고혈압, 궤양 등등)이 전염병을 대신하여 생명을 위협하고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현대적 의료에 드는 엄청난 비용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있고, 이제는 서구의 경제 자체를 침체에 빠뜨리고 있다. 치료방법들은 너무 자주 양날을 가진 칼이 되어 나중에 후유증을 일으키고, 그러면 우리는 절망적으로 또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환자보다는 증상 자체를 치료하는 비인간적인 치료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조차도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의료계에서의 정신분열증 같은 현상이 생겨, 사람들은 기존 의료체계를 버리고 기술의 실질적 이점을 자주 무시하지만 적어도 의사와 환자 간의 인간관계, 예방 치료, 자연 회복력 등을 강조하는 전일적holistic 의학 또는 다른 형태의 의술을 찾고 있는 것이다.
기술적 의료의 실패는 역설적이게도 그것의 성공 때문이었다. 성공이 너무나 엄청나 보여 의료의 모든 예술적 측면을 쓸어갔다. 의사는 사무실이나 연구실에서 일하는 하얀 가운을 거친 비인간적 기술자가 되었고 온 정성을 다하여 몰두하는 치료자가 더 이상 아니었다. 많은 의사들이 자신들의 환자들에게서는 배우려 하지 않고 오로지 교수들에게서만 배우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대대적 승리는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을 도그마로 만들곤 했다. 오늘날의 생화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 현상은 무시되거나 잘못 해석되었다. 사실상 과학적 의학은 과학의 중요한 원칙, 즉 새로운 자료와 정보에 의한 수정을 포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물리학을 그토록 생명력있게 만든 끊임없는 영역의 확대가 의학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현대 의학의 이면에 깔려있는 기계적 가정들은 금세기가 시작되는 무렵의 유물이다. 그때는 과학이 교조적 종교에 대해 전환의 당위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날 같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음은, 경직된 사고와의 전투에서는 결코 궁극적 승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공두뇌학, 생태화학적 화학, 영양화학, 그리고 고체물리학 등에서의 발전이 생물학으로 침투하지 못하였다. 초심리학parapsychology 같은 어떤 분야들은 과학적 탐구의 주류에서 전적으로 제외되었다. 오늘날 숨가쁜 찬사를 받고 있는 유전공학의 기술조차도 수십년 동안 도전받지 않은 원리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더 폭넓은 생명의 개념에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의학 연구는 그 자신을 거의 전적으로 약물치료에 국한시키면서 지난 30년 동안 암흑의 장막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의료생물학이 터널같은 좁고 어두운 전망을 같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체의 어떤 반응들, 즉 유전정보, 시신경계의 기능, 근육운동, 혈액응고, 신체와 세포의 호흡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꽤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복잡하지만 피상적인 반응들은 생명이 그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생화학자와 의사들은 생명에 관한 '진리' 파악에 있어서 30년 전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비타민C의 발견자인 앨버트 샌트되르디 Albert Szent-Gyorgyi가 말했듯이, "우리는 생명을 오로지 그 징후에 의해서만 알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통증, 수면, 세포분열의 제어, 성장, 그리고 치료와 같은 근본적 생명 기능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또한 우리는 각 신체 기관들이 지구, 달, 태양 등의 천체의 운동과 동조하는 주기 속에서 그 신진대사 활동을 통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다. 우리는 세포수준에서부터 신체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의식consciousness의 거의 모든 면들을 모르고 있다. "언제 플러그를 뽑을 것인가"하는 문제(뇌사상태에서 산소호흡기를 끌 것인가하는 문제를 말함)는 죽음을 진단하는 데 있어서도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계론적 화학은 생명의 이러한 수수께끼들을 이해하는 데 부적당하며, 오히려 그것들을 연구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어윈 샤가프 Erwin Chargaff는 DNA에 있어서의 짝짓기를 발견하여 유전자 구조를 이해하는 길을 열어 놓은 생화학자인데, 생물학에 대한 그의 글에서 우리의 딜레마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른 어떤 과학도 자체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현대적 의미로 유능하고 인기있는 의사는 못되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원하지 않은 불치병 환자들에 대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우리가 왜 그들을 치료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고심해 왔다. 나는 의료계의 권위적인 풍토에 거슬러 나아가면서 내 방식대로의 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러하여 나는 생명을 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미개척 분야를 연구하는 그룹의 일원이 된 것이다.
나의 연구는 우선 몇몇 동물들에게 있는 재생 능력에 대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는데, 특히 몸의 상실된 부분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는 도룡뇽에 주력하였다. 제1부에 실려 있는 이러한 연구들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동물 생명체의 새로운 면 -신경계의 부분들에 전류가 존재한다는 것- 을 발견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발견은 계속해서 골절의 치료에 대한 깊은 이해, 암 치료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인간의 장기도 재생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심장과 척수까지도- 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제2부와 제3부에서 다루었다. 궁극적으로 생명의 전기적 성질에 대한 지식은 통증, 치료, 성장, 의식, 생명 자체의 본성, 그리고 전자기적 기술의 위험 등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하였다.
나는 이러한 발견들이 생물학과 의학에 있어서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 의사들은 모든 질병을 정복하게 될지 모른다. 나는 또한 새로운 지식이 모든 유기체에 잠재해 있는 스스로의 자연치유력을 보여줌으로써 의학을 좀더 겸손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에 다루어진 그 동안의 연구 경험을 통하여 나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항상 불완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해 의학은 과학적이기보다는 예술적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 가서야지만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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