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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이야기

의사들은 왜 다르게 죽을까?

by 키다리원장님 2013. 2. 26.

일반인들과 비교할 때 의사들의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그들이 더 적은 의학적 처치를 받는 것이다. 

기사 링크 : 의사들은 왜 다르게 죽을까?


출처 : http://online.wsj.com/media/America_CV_20120226210234.jpg


의사들은 왜 다르게 죽을까


By KEN MURRAY


몇 년 전 명망있는 정형외과의사이자 내 멘토인 찰리(68)는 배에서 혹을 발견했다. 미국 최고의 외과의 중 한 명에게 진단해 본 결과 췌장암이었다. 이 외과의는 보통 5년인 췌장암 환자들의 생존률을 5%에서 15%로 세 배나 늘리는(비록 삶의 질은 형편없겠지만) 절차를 만들어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찰리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암을 진단받은 다음날 바로 집으로 갔고 자신이 운영하던 병원 문도 닫았으며 다시는 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가족과 남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을 뿐이었다. 몇 개월 후 그는 집에서 임종했다. 화학치료나 방사선치료, 수술 등 그 어떤 치료도 받지 않았다.


우리가 즐겨 얘기하는 주제는 아니지만 의사들도 죽는다. 그리고 희한한 것은 그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얼마나 많은 치료를 받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적게 받는지다. 의사들은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있으며, 어떤 선택권이 있는지도 안다. 또 자신이 원한다면 어떤 치료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조용히 가는 편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들 역시 죽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에게 현대 의학의 한계에 대해 설명하려하고, 시간이 왔을 때 그 어떤 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으려 한다. 일례로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심폐 소생술을 받아 갈비뼈가 부러지길(CPR이 제대로 시행하면 벌어지는 결과)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조셉 J. 갈로 연구팀은 2003년 글에서 생의 마지막 결정에 있어서 의사들이 원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765명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64%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해 놓았다고 한다. 이는 일반인의 20%와 비교되는 수치다. (폴라 레스터 등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대로 젊은 의사보다 나이든 의사들이 이러한 “준비”를 해 놓는 경우가 더 많다.)


왜 의사와 환자(일반인) 간에 이런 차이가 나는걸까? CPR(심폐소생술) 케이스를 보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CPR이 TV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에 관한 수잔 디엠 팀의 연구를 보면 시행된 CPR의 75%가 성공적인 것으로, 67%의 TV 속 환자들이 생명을 구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95,000건의 실제 CPR 케이스를 살펴본 2010년 연구결과 현실에서는 CPR을 받은 환자의 8%만이 한달 이상 생존했으며 이 중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한 환자는 3%에 불과했다.


의사들이 자신의 판단에 최선이라 여겨지는 치료를 하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환자의 선택을 중시한다. 의사들은 환자가 원하는 바를 존중하려고 노력하지만 환자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물을 때는 답변을 피하려 하는 때가 많다. 힘없는 환자에게 자신의 관점을 주입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환자들은 아무 소용도 없는 “구명(lifesaving)” 치료를 받고, 집에서 임종을 맞는 환자의 수도 예전보다 적어졌다. 간호학 교수 카렌 켈은 “평화를 향해: ‘좋은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분석(Moving Toward Peace: An Analysis of the Concept of a Good Death)”에서 좋은 죽음을 구성하는 것들로 편안함과 통제력, 마무리된다는 느낌 갖기, 최선의 관계 만들기, 케어에 가족 참여시키기 등을 들었다. 이 중에 병원이 제공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환자가 지시사항을 글로 남겨둘 경우 자신의 삶 막바지에서 더 많은 통제력을 가질 수 있긴 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죽음은 끝내 삼키기 힘든 약 같아서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제대로된 준비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 내 사촌 토치(60)는 발작을 일으켰는데 진단 결과 폐암이 뇌에까지 전이된 결과였다. 병원에서는 주 3~5회의 화학치료를 포함해 적극적인 치료를 받으면 4개월 정도는 살 수 있다고 했다.


토치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양’이 아닌 ‘질’적으로 풍요로운 여생을 살고 싶어했고 결국 뇌 팽창을 방지해주는 알약 외에 모든 치료를 거부한 채 우리집에 들어와 함께 살았다.


우리는 8개월동안 원없이 즐겁게 보냈다. 토치가 가본 적이 없던 디즈니랜드에도 가고 대개의 시간은 집에서 편안히 지냈는데 토치는 스포츠광이어서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내가 요리한 음식을 먹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특별히 심각한 통증도 없이 씩씩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토치는 깨어나지 않았고 잠든 것 같은 혼수상태로 사흘을 보낸 후 세상을 떠났다. 8개월간의 총 치료비(그가 먹던 알약값)는 20달러였다.


나도 내 주치의에게 원하는 바를 미리 지시해 두었다. 의사들에게는 거의 그렇겠지만 그것은 모두 쉬운 선택이었다. 극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때가 되면 나는 조용하고 평온하게 영원한 잠 속으로 빠져들것이다. 내 멘토 찰리처럼, 내 사촌 토치처럼, 수많은 내 동료 의사들처럼…


—머레이 박사는 은퇴한 남가주대 가정의학과 임상 조교수이다. 이 기사는 조칼로 퍼블릭 스퀘어(Zocalo Public Square)에 실린 글을 편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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