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나온 한방 EBM 자료들을 읽고 참고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부적합한 면이 많습니다.
첫째, 일본 의사들의 86% 이상이 한약(주로 과립제)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EBM 연구에서는 서양의학적 병명에 대응한 병명 투약을 하고 있습니다. 한의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은 일본의 의사들이 변증(辨證)이나 증치(證治)적인 지식이 없이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과 증거를 제시한 것이죠. 진입장벽을 낮춰서 처음 접근하기에는 편합니다.
예를 들어 ‘위염으로 인한 상복부 증상에 육군자탕이 유효하다.’ 이런 식이죠. 한의학적인 지식이 없어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효과도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한의사들이 동일한 환자를 본다면 육군자탕 말고도 훨씬 적합한 약이 많습니다.
둘째, 진료 체계가 다릅니다. 위의 일본의 육군자탕 환자는 대부분 그냥 동네병원에서 1차 진료를 받는 환자입니다. 요새 좀 소화가 안 되고 더부룩하니까 그냥 쉽게 가서 보험 혜택을 받으면서 부담없이 치료받은 환자입니다. 그런데 한의원에는 어떻습니까? 부담없이 내원하지 않습니다. 웬만한 단골이나 한약 애호가가 아니라면, 이 정도 불편해서는 한의원에 오지 않습니다. 동네 내과나 심지어 2~3차 병원까지 다 돌고 내원하는 “4차” 의료기관이 한의원입니다. 이미 양방에서 이것저것 다 해보고 온 그런 환자가 EBM으로 “유효하다” 정도로 나온 처방으로 쉽게 치료될까요?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치료율이 떨어집니다. 박살납니다.
셋째, 일본은 엑키스 제제의 품질도 좋고,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 장기간 투약합니다. 기본은 1~3개월이고, 6개월, 심지어 2년까지도 복용하면서 경과를 관찰합니다. 비용부담이 많지 않거든요. 그렇게 오랫동안 복용하면 당연히 치료율은 계속 올라가죠. 다들 아시다시피 한약 좋잖아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어떤가요? 환자들이 고가의 한약을 그렇게 오래 복용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질환에서 짧게는 보름에서 한달, 길게 봐도 2~3달 내에 ‘승부’를 봐줘야 합니다.
‘여드름에 형개연교탕(일관당)은 테트라사이클린(tetracycline)과 동등한 유효성을 발휘한다.’ 이거 EBM으로 다 결과 나온 거예요. 저랑 6개월 치료하시죠. 이거 안됩니다. 안 통해요. 사심탕이든 배농산이든 더 적방을 찾아서 짧은 기간 내에 호전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따라옵니다. 아토피도 마찬가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EBM 자료들은 유용하게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은 있는데 증상이 없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양방에서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진단명을 받아왔는데, 진찰을 해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불편한 곳이 전혀 없어요. 식욕, 소화, 수면, 대소변 등등 정말 깨끗합니다. 집증(執證)을 할 수가 없어요. 아픈 곳이 없으니까. 저는 그럴 때만 최후로 참고합니다. 예를 들어 6개월 이상 경과한 특발성 혈소판감소증(ITP) 환자가 왔어요. 혈액검사 결과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혈소판 수치가 떨어져서 코피가 멎지 않고, 그럴 때는 주기적으로 면역글로뷸린 주사를 맞고. 하지만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그럴 때 EBM을 뒤져서 줍니다.
제 진료에 있어서 EBM은 최후의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집증(執證)이 되면 그것에 의거해서 처방하지 다른 것은 쳐다보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EBM 자료보다는 대총경절(大塚敬節) 선생의 책들이 100배 이상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리고 EBM에는 살아 숨쉬는, 생동하는 개인이 없습니다.
물론 통념을 깨는 유용한 자료도 가끔 있습니다. 이런 경우죠.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안면신경마비인 벨마비 99례를 스테로이드군, 시령탕 투여군, 非투여군의 3군으로 나누어서 검토한 결과, 스테로이드의 효과는 非투여군과 다름없이 효과가 없었고, 시령탕군만이 마비 수치상 유의한 변화를 보였다. 이것은 스테로이드를 제1선택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통설을 뒤엎는 결과이다. 치료 개시 후 60일 이내에 치유한 환자를 조기치유군으로 분류하였다. 각 군에서 조기치유군의 비율은 3군간에 유의한 차는 보이지 않았지만, 조기치유군에서 비교하면 치료일수는 시령탕 투여군이 나머지 2군과 비교하여 유의하게 단축되었다.
- 일본동양의학회 EBM특별 위원회, 조기호역, 한방 처방의 EBM, 고려의학,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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