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의 도화탕(桃花湯) 치험례
이런 치험례를 써야 한다. 마치 눈앞에서 환자를 관찰하듯이 병력과 증상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환자의 증상뿐만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사의 당혹감과 심리 상태의 변화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당대의 명의(名醫)인 대총경절(大塚敬節)과 시수도명(矢數道明) 두 사람이 서로 교류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시수도명(矢數道明) 선생의 치열한 기록 정신은 일반인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의하시는 분들 중에, 사실은 삽질을 거듭하면서 겨우 겨우 힘겹게 치료한 환자를, 강의하면서는 그냥 초진 때 증상 적고 ‘이건 좀 어려운 처방인데, 이럴 때는 이 처방 쓰면 됩니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겠지만, 중간에 헤맨 과정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맞다.
또 간혹 치험례랍시고, 챠트 죽 긁어서 올리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만 알아먹는 약자로 뒤범벅인 챠트를 누가 읽어주나. 풀어서 써야 다른 사람들도 알지.
환자는 34세의 부인이다. 필자가 처음 진찰한 것은 금년 8월 16일 이른 아침이었다. 병상을 물으니 본증(本症)은 약 50일 전에 일어났고, 발병 당시 40도 가까운 발열이 있었다. 이 집안의 습관으로 무슨 병이든 大橋液 주사를 맞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여러 번 주사를 맞았다. 그러나 열은 여전히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3일째부터는 혈변(血便)이 발견되었으므로 드디어 의사를 바꾸고, 완전히 병실을 소독 격리하여 치료를 받았다. 한 때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 만큼 심한 증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열도 차차 내려 지금은 아무런 자각적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환자가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것은 1일 수회의 농혈변(膿血便)의 배설이었다. 그러나 후중(後重)도 없으며 복통도 없다. 가끔 2일 정도 변비일 때도 있으나 관장(灌腸)이라도 하면 계속해서 2~4회 혈액과 점액이 섞인 변이 나온다. 그래서 전신이 차츰 쇠약해지는 한편, 먼저 번 의사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고 한다.
진찰해보니 환자는 안면이 창백하고 수척하며, 아주 조용히 누워서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 같았다. 맥을 보니 침세(沈細)하고 삭(數)하였으나 힘은 있었다. 혀를 살피니 더럽고 죽이라도 먹은 뒤처럼 얼룩진 설태(舌苔)가 끼어 있으나, 구갈(口渴)도 구고(口苦)도 없다. 식사는 입맛이 없지는 않고, 식욕이 항진하여 참을 수 없는 상태도 아니다. 조금 과식하면 오목가슴 부위가 더부룩하고(心下滿), 설사의 도수가 증가한다. 배는 심하일체(心下一體)로 비경(痞硬)하여, 배꼽에서 위쪽은 널빤지처럼 딱딱하나 배꼽 아래로는 완전히 힘이 빠져 물렁물렁하고 허(虛)하며 연(軟)한 상태이다. 오랜 설사로 하초허탈(下焦虛脫)한 것이다. 왼쪽 배꼽 옆은 구련(拘攣)하고, 심장의 동계(動悸)가 느껴진다. 소변은 몇 번 있고 색은 황갈색이라고 한다. 기타 두통, 오한, 신체통 등을 아무것도 자각적으로는 호소하지 않는다.
필자는 음허(陰虛)이되 아직 사열(邪熱)이 심하제방(心下臍傍)에 울색(鬱塞)하는 것이라고 보고 《수세보원》의 백출화중탕(白朮和中湯)을 투여하였다(처방 : 당귀 작약 백출 복령 진피 각3g, 황금 황련 각2g, 감초 목향 각1g). 그리고 이것을 복용하면 약간 발열(發熱)할지도 모른다고 일러두었다. 이틀째 아침에 전화로 용태를 다음과 같이 보고해 왔다. 열은 오히려 내려서 36도 2분 정도인데 맥이 반대로 90을 넘어 가슴이 답답하고 동계(動悸)가 느껴진다. 발이 차갑고 왠지 불안을 느낀다고 하였다. 다음날 왕진해 보니, 심하(心下)의 비경(痞硬)은 얼마간 완화된 듯하나 배꼽 근방의 동계(動悸)가 뚜렷하다. 대변의 성질은 나쁘지 않으나, 맥은 침세삭(沈細數)하여 그 전보다 힘이 없다. 만져보니 발이 차다. 체온표를 보니 복약 후 맥과 체온이 세 번이나 교차(交差)하고 있다. 일반 상태가 매우 불안하며 쇠약의 상태이다. 나는 신속한 처방 변경의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처방 중의 황금, 황련은 실열(實熱)의 사제(瀉劑)로 이미 이 환자에게는 적당치 않다. 그런데 이 경우 무엇을 투여해야 할까. 나는 여러 서적을 섭렵하여 심사숙고하였으나, 이와 같은 증상에 경험이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생기지 않으므로 대총경절(大塚敬節)씨에게 이 증상을 설명하였더니, 이것은 아마도 도화탕(桃花湯)의 증(證)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질이 며칠 지난 후, 열기(熱氣)가 이미 퇴(退)하고 맥지약(脈遲弱) 혹은 미세(微細), 복통과 하리(下利)가 그치지 않으며 변농혈(便膿血)인 자는 이 처방이 좋다. 만약 신열(身熱), 맥실(脈實), 구갈(嘔渴), 이급후중(裏急後重) 등의 증상이 아직도 있는 자는, 우선 그 증세에 따라 소리(疏利)의 제(劑)로써 열독(熱毒)을 구축하고, 장위(腸胃)를 탕척(蕩滌)할 것 등등」이라는 《類聚方廣義》나 기타 《百疢一貫》등의 구결(口訣)을 인용하여, 도화탕(桃花湯)을 투여하여야 할 연유를 명확히 설명하였다. 그 합당한 연유를 통감하며 3일분을 투여했다. 이것을 겨우 두 첩 복용했는데 맥상이 신속히 양호해지고, 다리의 냉(冷)도 나았으며, 심신이 경쾌함을 느꼈다며 그 후의 용태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3일 후 혈변(血便)은 없어졌으나 점액은 여전하였다. 단, 이전처럼 하루에 여러 번 있는 일은 없다. 도화탕의 처방은 적석지 6g, 갱미 8g, 건강 1.5g으로 나는 이것을 전부 함께 달여서 썼다.
도화탕 처방 후에 만약 1복(服)으로 나으면 그 나머지를 복용시켜서는 안된다고 되어 있으나, 환자의 경과가 양호하였으므로 점액이 있는 동안에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약 1개월 가까이나 본방을 계속하였다. 요즈음 식사는 죽으로 환자는 도무지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궁리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가족이 작은 병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였다. 완전히 백묵을 녹인 액체와 같은 새하얀 점액변이었다. 고인(古人)은 이것을 백리(白痢)라고 하였는데 과연 새하얗다. 나는 이것을 기혈양허(氣血兩虛)의 징조로 보고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으로 처방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두첩씩으로 하였더니 백리(白痢)는 즉시 치유되었고, 기력이 갑자기 소생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안색에 홍조를 띠었으며, 식욕도 급격히 증진되었다. 따라서 보통식을 섭취하게 하였다. 그리고 본 처방을 1일 3첩씩 복용시켰더니, 더욱 더 원기 충만하는 느낌이 있다고 하면서 환자는 기상(起床)을 원했다. 본방으로 바꾼 지 2주 만에 환자는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여 병상을 떠났으며, 이윽고 보행도 자유스러워지고 대변도 또한 정상으로 돌아왔다. 실로 나의 초진 때부터 꼭 2개월 만이다. 나는 중도에 도화탕(桃花湯)의 뛰어난 효험을 통감하였고, 백리(白痢)를 본 뒤에는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의 탁효에 다시 한번 놀랐다.
-- 시수도명(矢數道明), 정민현 譯, 한방치험정선집 상권, p.263, 삼원문화사, 1999년
▪ 도화탕(桃花湯)
306) 少陰病, 下利, 便膿血者, 桃花湯主之.
소음병에 피고름이 섞인 설사를 하면 도화탕으로 다스린다.
307) 少陰病, 二三日至四五日, 腹痛, 小便不利, 下利不止, 便膿血者, 桃花湯主之.
소음병 2~3일에서 4~5일째에 배가 아프고 소변이 잘 나오지 않으며 설사가 그치지 않는데 설사에 피고름이 섞여 나오면 도화탕으로 다스린다.
적석지(반은 덩어리로 쓰고 반은 가루로 만들어 체를 쳐서 쓴다) 1근, 건강 1냥, 갱미 1되.
이상의 세 가지 약을 물 7되에 넣고 쌀이 익을 정도로 달인 다음 찌꺼기를 걸러내고 7홉씩 따뜻하게 복용하는데, 적석지 가루를 방촌비(方寸匕)로 타서 하루에 3번 복용한다. 한번 복용하고 나으면 남은 것은 복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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